2015 장소에서 사람을 향하는 미술 : 공공예술 이야기 Communutie Art Story, From Physical Place to The People (2015 리움 아트클라스 강의)

2015 삼성미술관 리움아트클라스 강의안


물리적 장소에서 사람으로 향하는 미술
: 미술에서 장소성 개념의 변화 

최형욱 (인사이트씨잉)


프롤로그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사느냐? 라는 것은 많은 문맥과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다. 모든 상황은 문맥이 중요하다. 장소를 묻는 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알아보는 것 이상의 문맥과 상황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는 것이다. 장소성과 미술이라는 주제는 미술이 어디에 놓이느냐?’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어디에 놓이는가 라는 질문은 곧 누구를 위해 제작되느냐?’로 이어지고 주문자나 수용자에 대한 문제를 전제로 한다. 예술이 누구를 목적 삼느냐라는 이 질문은 예술의 근본적인 전제, '누가 누구를 위해 제작하고 왜 제작하는가라는 것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이 복잡한 논쟁을 제기한다. 영어로 'Take place' 라는 문구는 '사건이 일어나다' 를 의미한다. 장소는 사건이나 스토리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이다.



1. 미술과 장소가 하나였던 시대

라스코 동굴벽화

원시미술, 종교건축, 궁정미술 등에서 장소와 미술은 분리될 수 없다. 종합적인 경험으로써 장소를 만들었다. 원시미술부터 프레스코화,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성당, 궁정 건축물들을 아우른다. 특히 서양의 성당이나 궁정 건축물에서 조각 작품은 건축과 분리 될 수 없었다. 조각작품은 건축의 요소였고 일부였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예술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공예로 손수 생필품을 만드는 것 이었고, 종교예술은 제의를 위한 도구였다. 장인들의 길드 조직도 생필품 길드부터 금속공예가 길드에 이르기까지 위계나 구분이 없었다. 모두 같은 장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미술 작품은 건축 안에 종속되어 있었다. 건축이나 장소를 떠나 따로 이동과 판매 가능한 미술 작품이 거의 없었다.

2. 미술 안에 장소
미술 안에 장소라는 개념은 장소를 화폭에 담거나 미술언어로 재현하는 작품들을 의미한다. 동양의 산수화는 사대부 귀족의 수양을 위해 명승지를 화첩에 옮겨와 정신적인 여행을 할 수 있는 와유사상이 담겨 있었다. 서양에서는 약 500년전부터 이젤 회화가 유럽에 보급되면서 미술은 이동 가능한 물품이 되었다. 15세기경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화가 처음 발명되었고 이동 가능한 캔버스 회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19세기초에 영국에서 주석튜브 유화물감이 발명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이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풍경화는 아름다운 세상 혹은 이상적인 세상을 보기 위한 창으로서 미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미술에서의 장소성이다.


3. 장소맥락에서 떼어져 나온 미술: 모더니즘 미술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제국주의와 양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이 완성되었다. 그곳에는 아프리카부터 페르시아,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망라하는 문화예술 유산들이 원래 역사적 장소에서 떼어져서 이동되어 수집 분류 전시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모더니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환경과 맥락과 분리되어 독립을 추구한다. 모더니즘은 미술 이외의 다른 목적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고 본질적인 회귀, 정신을 추구한 미술이다. 작품 내부요소의 구성을 통해 작품의 의미가 완성된다. 작품은 환경과 상관없이 이동 전시 가능하고 작품을 기타 방해 요소 없이 집중해서 감상하기 위해 화이트 큐브라는 순백의 공간을 선호한다. 이때 조각의 좌대나 회화의 프레임은 작품을 신화화하고 영웅화 하고 세상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4. 공공장소에서의 미술
공공 장소에서의 미술은 미술작품이 미술관 밖으로 나온 흐름들을 의미한다. 공간 맥락을 중요시한 미니멀리즘이나 장소 자체를 작업으로 삼은 대지미술부터 미국국립예술기금과 같은 공적자금의 지원을 받아 공원, 광장 등 공공공간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세운 조각이나 미술 작품들을 의미한다.
장소특정적 미술들은 환경을 맥락을 중시하고 기존의 제도 틀을 벗어나 화이트큐브 밖으로 나왔다는 지점에서는 전위적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작가 개인의 역량을 과시하고 보여주려 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연장선에 있다. 예를 들면 1960년대 중 후반부터 미행정관리청(GSA)에서는건축 속의 미술 프로그램, 국립예술기금(NEA)공공 장소 속에 미술 프로그램을 발주했는데 목적은 동시대 미술 중 최상의 것을 가능한 많은 관객에게 제공하려 하는 것 이었다.[i] 주로 알렉산더 칼더, 헨리 무어 등 당대 유명한 백인 남성 조각가들의 작품을 공공장소에 설치하였다. 헨리 무어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느 장소에 가서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생각해내야 하는 식의 작업 의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조각 중의 하나가 자리를 잡게 될 어떤 장소를 고려하도록 요청을 받을 경우, 나는 그간 해 놓았던 작업이나 작업하려던 것 중 에서 적합한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특별히 그 장소를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눌러앉아 무얼 하진 않는다. "[ii]
또한 대지미술의 거장인 크리스토는 미술은 독립의 과정이 중요하다. 개인주의의 관념이다. 자유를 위한 외침이다.” 라고 말했다. 거장들의 작업을 미술관 밖, 비미술적 환경 속에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지만 작가 개인의 자유나 표현을 위해 장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모더니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지나 야외를 캔버스 삼아 작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1) 장소를 맥락화한 미술: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은 야외 공간이나 공간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공공장소에서의 미술' 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미니멀리즘은 작품에서 여타 형상이나 환영적 요소를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상통하지만 또한 환영의 공간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작품을 구분하는 액자나 좌대로부터 내려와 실재 공간 속에 작품을 놓이면서 작품에 공간적 개념을 포함했다는 측면에서 모더니즘을 뛰어 넘으려 했다.
특히 로버트 모리스는 신체의 움직임에 따른 관람객의 '지각'이라는 요소까지 작품으로 끌어왔다. 로버트 모리스는 작품의 모양을 최소한의 모듈로 제약하고 변주하여 바닥에 놓음으로써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 관람객이 움직임에 따라 작품에 대한 지각인 바뀌는 관람객의 움직임과 시간적 요소까지 작품의 범주를 확장했다. 흔히 미니멀리즘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미술을 의미한다는 생각인데 사실 미니멀리즘의 미술사적 기여는 깔끔한데 있는 게 아니라 작품자체를 지우고 공간, 시간, 관람객의 지각, 현존성 등 타성적인 요소들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온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에서 모든 것을 제거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조차 제거하고자 하였고 작품 주변의 환경 공간, 관람객의 스스로에 대한 인식까지 작품의 일부로 여겼다. 다시 말해 미니멀 조각은 작품에 환영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작품의 의미가 작품 자체 에서 발행하는 게 아니라 작품 외부와 관람자가 만나는 공간 즉 '장소'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언급된 관람객의 지각에서 완성되는 요소. 작품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장소라는 개념이 후에 공공영역으로 확장된 미술과 연결 고리를 가진다.

(2) 미술의 공공성 논쟁 : 리차드 세라 <기울어진 호>


미연방광장 리차드세라 작품 <기울어진 호>

리차드 세라는 당시 국제적 명성을 가진 조각가로서 특히 장소 특정적 작품으로 유명했다. <휘어진호>는 조달청과의 계약으로 1981년 연방광장에 설치되었다작품은 길이 36여미터높이 약 3.6미터의 긴 철판으로 되어있었다거대한 철판은 연방광장을 가로질러 설치되었다그런데 작품설치 후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히게 되었다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수 백 통의 항의편지를 보내온 것이다공청회가 열렸는데 연방공무원과 지역주민들은 작품이 도시 미관을 해칠뿐더러 광장의 개방성을 막기 때문에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 작가를 포함한 미술가들은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였다공청회 결과 조달청장은 작품 이전을 결정하였고 예술가는 조달청장을 상대로 소송하였다결과는 예술가의 패배였다소송은 졌지만 미술계의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표현의 자유와 공공장소에 설치된 작품의 경우 다수의 시민이 추하다고 여길 경우 이를 파괴할 수 있느냐 의 문제가 제기 된다.[iii]


물론 세라의 작품은 단순한 plunk 아트만은 아니었다. 그는 <기울어진 호>로 광장 공간을 훼방하여 여러 사람이 누구자 좋아하고 환영하는 미술작품 또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신화적인 것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일부러 공간을 훼방하고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공공성에 대항하는 작품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은 고압적이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미적으로 아름답지 않고 공공성에 부합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이 논쟁을 통해 공적인 기금이 미술제작에 투자 될 때 기금의 당위성에 문제 제기가 일어났다. 비슷한 시기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 예수>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동성애 사진들도 공적 기금으로 전시된 것에 대해 지역사회 보수층이 반발하였고 논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공적기금의 온당한 사용을 위해 소수 전문가들에 의해 심사되고 공중에게 하달되는 상명하달식의 공공미술 제작이 공동체 구성원의 참여를 통해 이와 같은 적대적 반응이 생겨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말 <기울어진 호> 사건이 후 공적기금을 사용한 미술제작에 있어서 '공동체의 참여'가 더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공공미술을 주문의뢰를 위한 심사위원과 검토위원회에 미술과 무관한 공동체 대표들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이 소송의 결과대로 공공은 옳고 작가는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무지한 공공에 의해 작가의 저작권이 훼손된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공공과 예술 사이에서 논쟁자체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작가의 원래 의도가 그것이었을 수도 있다.  


(3) 안토니 곰리 <One & Other>



그의 작품세계는 미니멀리즘의 전통에 상당부분 기원하고 있다. 미니멀리즘이 최소한의 형태를 사용한 반면 곰리는 자신의 인체 본을 이용한다. 자신의 인체를 떠내고 덫 붙이기를 통해 개별성을 지우고 디테일을 최소화하고, 관람객과 같은 공간 안에 현존(presence)시키고, 시간에 따른 풍화과정까지 작품의 요소로 들여 온다는 측면에서 미니멀리즘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09년에 실행된 그의 작업을 보면 좌대에서 내려온 미술의 주체가 작가로부터 수용자로 확대되었음을 흥미롭게 확인된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 앞에 트라팔가 광장에 4번째 좌대가 비어있다. 이 좌대는 1999년 영국 왕립 예술 상업 공업 진흥회(Royal Society for the encouragement of Arts, Manufactures and Commerce)의 지원으로 공공적 가치에 대한 논쟁적 이슈들을 생산해내는 가장 실험적인 예술 무대가 되었다. 2009 7 6일 시작해 10 14일 까지 안토니 곰리의 프로젝트 "One & Other"가 진행되었다. 2400명의 지원자들을 접수 받아 그 좌 대에 한 사람이 한 시간씩 100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의 퍼포먼스를 실행하는 도전적인 실험이었다. 누구는 그곳에서 디제잉을 했고, 누구는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니면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들의 목소리들을 통해서 지난날 대영제국이라는 제국주의적 표상원리에 의해서 고안된 트라팔가 광장이 갖는 패권적이고 남성적인 의미는 전복되었다.[iv] 이 프로젝트는 공공 장소에서의 미술의 의미, 장소성, 시간, 창작자에서 수용자로 중심이동 등 현재의 논쟁적인 여러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과도기적 예시가 될 수 있다.


5. 도시 계획 속의 미술
야외로 나온 미술들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많은 비평가나 후원자들은 공공미술이 기껏해야 일률적인 환경에 그럴듯한 장식적 효과를 부과하는 텅빈 트로피라고 비판하기도 한다.[v]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규정된 공공미술에 관련된 법규를 건축물 미술 장식법이라고 불렸다. 언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나라에서 공공장소에 있는 미술조각들은 장식이라는 개념을 뛰어넘기 힘든 것들이 대다수였다는 의미이다. 이 제도의 대표적인 문제점에 대해 서울디자인재단의 박삼철 본부장의 정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양심적인 미술인, 심의과정 에서의 담합에 따른 편의주의적 작품설치.
-설치비용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제작되는 예술성이 낮은 미술품 양산, 도시경관 훼손.”[vi]


이러한 작품들의 제도적 한계와 양질의 미적 경험이 보장되지 않는 공공 장소의 미술에 대한 반성으로 근본적으로 도시계획 단계에서부터 미술가 건축가 미학 도시 행정가들이 종합적으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의견에서 발전한 것이 '도시계획 속의 미술'이라는 개념이다. 기금제도와 같은 시스템을 세우고 도시 전체 차원에서 공공장소 네트워크를 조성하고 미술 작품설치 외에도 문화시설과 문화 프로그램까지 포괄하는 보다 확장된 개념이다.[vii] 프랑스에서는 오래 전 라데팡스 계획이 도시계획 단계에서 미술이 도입된 사례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시의 <도시갤러리프로젝트>, 문화체육관광부의<마을미술프로젝트>사업과 <문화를 통한 재래시장 활성화 시범사업> 등 이 있다. 또한 1% 건축물미술장식법의 부작용에 대한 대안으로 70% 공공기부금 제도 실행되고 있다.


6.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과정중심과 소통중심의 80년대 이후 다양한 미술 경향들을 아우르는 용어 이다. 미술에서 장소를 물리적 장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 공간으로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미술가는 공공영역에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관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공성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프로듀서이자 기획자, 혹은 촉매자로서 역할을 한다.


(1) 보더아트워크숍 BAW/TAF



그들은 1984년에 설립된 국경을 자신들의 지적인 영토로 삼고 공동작업을 중시하고 학제적인 다민족 교육가, 문필가들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대한 쟁점들 퍼포먼스로 다룬다. <국경선의 끝 End of the Line 1986>이란 작업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장소에서 국경이 양분된 테이블 위에서 "불법적"으로 음식을 교환하며 "불법적으로"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으로 힘있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국경 봉합 Border Suture 1990>라는 퍼포먼스는 멕시코 만에 서 태평양까지 2000마일을 국경을 지그재그로 여행하며 제의적인 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프로젝트는 국경 연구부분, 퍼포먼스/개임/걸치기 부분, 여행하는 의료 쇼 부분, 조심스러운 치유 행위, 그리고 삼투 부분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동주택 버스가 내부 사교방, 바퀴달린 작업실, 토론방, 그리고 국경을 횡단하는 숙소로 사용되었다. 미술가와 관객의 구분은 의식적으로 지워졌다. 구조는 누구라도 참여 할 수 있게 그리고 언제라도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유동적인 상태로 유지되었다." 그 중 <국경 스테이플> 국경지 내 거주자 및 무비자 이민자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두 나라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스테이플로 땅에 박는 치유적인 행위 퍼포먼스를 벌였다. <국경 세례식>은 이 스테이플에 태평양, 멕시코만, 리오그란데 강의 물을 끼얹으며 축복했다. <국경 줄다리기>는 엘파소, 텍사스, 티주아나, 멕시코의 불법 월경 장소로 알려진 곳에서 그 곳 이민 노동자들의 승낙을 얻은 후 줄다리기 의례를 행하였다. 한 팀은 멕시코 미국 국기요소를 결합한 레스링 마스크를 쓰고, 한쪽은 국경 경찰 마스크를 썼다. [viii]


(2) 고든 마타클락


건축학도였던 마타 클락은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도시의 지리학에 드러나는가를 심각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도시 환경 내에 존재하는 단절된 곳과 비개발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작업했다. 건물보다는 길가다 신발 끈을 매고자 서는 장소와 같이 실생활의 움직임이 멈추어지는 그런 장소에 관심을 가졌다.[ix] 1974년 화랑주인인 홀리 솔로몬이 소유했던 건물이 재개발을 앞두고 헐리게 되었다. 마타 클라크는 화랑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이 건물의 가운데를 자르고 밑의 기초를 어느 정도 파내어 건물이 쪼개지기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의 주요 목적은 이 건물을 자명하게 하나의 건물로 드러나게 하는데 있었다. 즉 자르기 작업을 통해서 공간을 좀더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소로서의 건물,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건물에 대한 정체성은 강력하게 보존되고 강화되었다.[x]


(3)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볼탕스키의 <실종된 집>이란 작품은 동 베를린에 있는 구 유대인 거주지에 있는 집이 1945년 연합군 폭격을 받았을 때 틈이 생긴 테라스 위에 설치되었다. 집들의 양면에는 과거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과 거주 기간이 쓰인 표를 붙였다.[xi] 비워져 있는 장소성안에서 드러낸 비영웅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4) 그룹 매터리얼


"미술을 제시하고 선택하는 것은 그것을 생산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라는 모토로 시작된 팀이다.. 로어이스트사이드 지역의 라틴계가 사는 구역에 상점에 대안 갤러리를 열었다. <Arroz con Mango>라는 첫 번째 전시에서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지역주민들에게 대표적인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느껴서 집에 가지고 있는 "귀중한"물건을 전시를 위해 기부하도록 요청했다. 종교 도상, 기념달력, 스포츠 포스터, 조각된 그릇, 가족추억사진, 그리고 실제미술 품 등.. 비미술적인 시각자료들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연대기적인 방식으로 전시하였다.[xii] 미술관 전시의 방법을 해체하고 글과 상업광고, 정치적 정보 등을 제시하는 절충적이고 혼합적인 전시방법을 사용하였다.  


(5) 밀 유켈레스


그녀는 시의 59개 구역으로부터 온 청소노동자들 그리고 십장들과 함께 담당 구역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에 대해 할게 되었다. Touch Sanitation 라는 퍼포먼스는 11개월동안 뉴욕의 다섯 개 자치구를 방문했고 8500명의 노동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실제 미술작업은 악수 그 자체이다. 내가 청소부와 악수를 할 때.. 나는 그들이 반응하는 방식 속에서 그들은 그 미술을 끝낸다."[xiii]


(6) 주디스 바카


멕시코 벽화 전통을 캘리포니아에 있는 라틴 공동체의 문화적 요구와 결합하여 장기간에 걸쳐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지역 정치인, 육군 공병대, 교사, 인류학자, 공무원, 십대 갱단원, 교도소시스템 등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끌어내어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The Great Wall of LosAngeles> 1976년부터 1990년대까지 진행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벽화프로젝트이다. 벽화 내용은 토착민들의 역사, 이민자들의 역사, 여성들의 투쟁과 기여에 대해 묘사하였다. <The World wall : a vision of th future without fear, 1976-지금까지> 지구적 평화를 상상하는 여행하는 벽화 프로젝트이다. 10x30 피트 판넬 14개로1990년 핀란드 세계 평화 페스티벌에서 처음 공개해서 모스크바, 이스라엘 팔레스틴, 멕시코, 미국 각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지금도 이동전시 계획 중 이다.[xiv]


(6) 찰스 시몬즈


도시 보도, 빌딩 건물에서 돌출한 부분에 진흙 미니어쳐 벽돌로 소 문명 도시, 고고학적 유물들을 남기는 작업을 한다. 70년대 그는 길에서 작업하기 위해 작업실을 떠났고 1898년 까지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에서 작업을 설치 할 때마다 도시지역에 전시에 병행하는 문명도시를 건축했다


<Untitled Dwellings of the Lower East Side 1971-76>
그의 작업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 빨리 지나쳐서 놓치거나 실수로 뭉개 버릴 수도 있다. 그는 작업하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공동체의 쟁점이나 이슈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지역의 쟁점이나 생활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지역주민들과 대화를 통해 주거 상황의 개선을 위해 집세 시위를 이끌어 내기까지 했다.[xv]


(7) 프레드 윌슨
뉴욕의 설치미술가이다. 카리브 혈통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술가인 윌슨은 미술관이 어떻게 인종적, 민족적 소수자를 재현하거나 재현하는데 실폐하는지를 폭로하려고 설치 작업을 한다. 미술관이 그를 초대해서 전시품을 수정하고 그의 맥락으로 해석하도록 초대하고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 이었다. 문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Mining The Museum, 1992-1993>

볼티모어의 두 개의 미술관 '컨템포러리 미술관' '메릴랜드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 미술관(MHS)' 사이의 공동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컨템포러리 미술관에 초대되었을때 MHS 소장품 중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민에 관련된 역사를 복원하는 오브제들을 일 년 동안 발굴했다. 그는 방대한 양의 역사적으로 상이한 사실들을 재현하고, 폭로하고, 병치를 만들어 냈다. 그는 나폴레옹의 흉상, 미국정치인, 남북전쟁 영웅의 흉상과, 노예폐지론자, 아프리카계 존경 받는 학자의 빈 좌대를 병치시켰다.  KKK단의 두건과 유모차를 병치하고, 노예 족쇄를 당대의 의자들 주변에 놓았다.[xvi] 배치에 따른 문맥적 상황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역사의 이야기들이 왜곡되고 희석되고 선택적으로 배제되었는지를 드러낸다.

(8) 쉴라 르브랑 드 브레트빌
공공미술가, 역사가와 건축이론가와 함께 "Power of place" 라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했다. 서로 다른 종족 공동체들의 로스엔젤레스 역사에 행한 기여를 가시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공공미술, 역사보존, 도시디자인작업을 하는 소규모 그룹이다. 드브레트 빌은 정밀한 공공적 소통을 통하여 종족적이며 젠더적인 행동주의 여성문화 이론가이자 실천가이다




이 작품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영구적인 공공미술작품이다. 원래 노예였다가 나중에 산파를 거쳐 땅소유자, 나중에 로스엔젤레스 지역사회 존경 받는 일원이 된 메이슨 할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벽에 가로 세로 82피트와 8피트의 연대기이다. 비디 메이슨의 삶과 병행한 로스엔젤레스 도시 역사를 추적하는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로 된 사각형 부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녀를 더 알기 위해 공공 역사 워크숍이 열리고 역사가, 시나리오 작가, 비디 메이슨의 후손들이 포함되었다.[xvii] 거대한 역사적 영웅이나 전사 혹은 정치인도 아닌 한 여성을 삶을 통해 지역 역사를 들여다 보는 작업이다.


에필로그


공감하고 귀 기울이는 것은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자신의 자아를 탈 중심화 한다. ‘귀 기울이기는 자아에 뿌리를 둔 미술, 즉 자아와 타자가 서로 얽히게끔 촉진하는 미술은, 자아에 의해 한정되지 않고 상호 호혜적인 공감의 방식으로 공동체로 확장해 가는 일종의 흐름이 넘나드는 경험을 제안한다.”[xviii]


사실 공동체 현장 지향적인 미술작업이 미술관에서 수용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미술관의 본래 속성자체가 미술품을 수집, 보존하고, 교육하는 것인데 이러한 성격과 대치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단 작업의 결과물이 소유가 불분명하고 미학적으로 확실한 오브제가 생산되는 것도 아니며, 미술가의 역할 또한 분명하지 않고 흡수되거나 절충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작업에서 미술작가는 품팔이 노동자, 공무원, 상담자, 세일즈맨, 사무직 노동자, 협상가, 사회운동가, 심지어 정치인이기도 하다


소위 말하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개념미술에 뿌리를 두고 여러 매체들을 뒤섞고 작가 주체성은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뒤섞는 전위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러한 미학적으로는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만큼 메리 제인콥의 말처럼 무시와 격려 사이에서 요동친다.


오늘날 작가는 '항공 마일리지로 성공 여부가 판단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작가는 더 이상 오브제 생산자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비엔날레나 국제전시 미술관의 요청에 따라 계약하고 행정적 협상을 거쳐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정가가 되어야 한다. 작가는 세계의 이 장소와 저 장소를 떠돌아 다니면서 그 장소의 고유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이용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전형적인 관행이 되었다


이때 작가가 대하는 그 장소, 그 지역,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이용하거나 타자화시키지 않고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이상적인 공동체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작가도 자기 이익을 위해 공동체나 지역성을 들먹이며 이용하기 말아야 한다. 차이들을 인정하고 고유성을 발견하고 단기간 안에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하거나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까? 세계나 지역을 유랑하며 공동체를 대상으로 미술 프로젝트를 하는 작가들을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공동체의 쟁점을 다루고자 할 때, 공동체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이러한 작업이 결국 도시 정책자들이나 제도 미술권과 같이 큰 그림을 다루는 집단들에게 장소성을 윤색하고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i] 권미원, 김인규외 역, 장소 특정적 미술, 현실문화, 2013, p105
[ii] 권미원, 같은책, p98 재인용, Henry Moore, Henry J. Seldis, Henry Moore in America ( NewYork: Preager, 1973) p176-177
[iii] 양현미, <예술에서 퍼블릭 개념의 변화에 대한 고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성: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접근, 미메시스, 2008, pp272-277
[iv] 나조영, <열린광장과 공공성>, www.designdb.com/dtrend
[v] 권미원, 같은 책, p105
[vi] 박삼철, <미술이 꽃피는 공간(space)에서 삶이 머무는 공간(place)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미술 토크시리즈 자료집, 2012, p43
[vii] 양현미, 같은 논문 pp 267-269
[viii] 수잔 레이보비츠 스타인만 <지향의 신호들: 미술가들 작업 일람>, 수잔 레이시 편, 이영욱 외 옮김,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 지형그리기, 문화과학사, pp296-298
[ix] 마이클 아처, 오진경 외 역,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시공아트, 2007, pp162-164
[x] 토니 고드프리, 전혜숙 역, 개념미술, 서울 : 한길아트, 2002, pp257-258
[xi] 마이클 아처, 같은책, p224
[xii] 수잔 레이보비츠 스타인만 <지향의 신호들: 미술가들 작업 일람>, 수잔 레이시 편, 같은책, p332
[xiii] 수지 개블릭, <접속의 미학>, 수잔 레이시 편, 같은 책, pp111
[xiv] 수잔레이보비츠 스타인만 <지향의 신호들 : 미술가들 작업 일람>, 수잔 레이시 편, 같은책, pp289-292
[xv] 같은책, pp432-434
[xvi] 같은책, pp449-451
[xvii] 같은책, pp318-320
[xviii] 수지 개블릭, <접속의 미학>, 수잔 레이시 편, 같은 책, 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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