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페키트 : 성수동 프로젝트 Fecit: Seongsu-Dong Project

2015 사물학II 제작자들의 도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Fecit:성수동 프로젝트 






기       획 : 인사이트씨잉(조성배,나광호,이정훈,최형욱)
전시기간 : 2015.2.17-2015.6.28
후       원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도구들 Arousing tools_acrylic, serigraph on leather_가변크기_2015



인사이트씨잉은 그 동안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실제 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기획이나 공적인 지도에서는 익명으로 처리되는 개개인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에게 삶 속에 체득된 공간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주민들 손으로 그린 지도, 아카이브북 등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우리가 주목하는 지점은 사소하고 쓸데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 속에 의외의 순간 불쑥 발견되는 거대한 기획과 상충되는 개인들을 전유된 기억이나 자기화된 방식의 삶의 태도들이다. 우리는 수치와 도표와 거창한 조감도로 표현되는 도시기획에서 결코 발견될 수 없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지표 아래에서 묵묵히 고민하며 일하고 있는 개개인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성수동 일대는 원래 해방 후 채소밭과 경마장이 있는 전형적인 서울 도성 밖이었고, 어린이 공원자리는 제3공화국 시절 한국 정치 경제계의 실력자들의 사교 골프장이었던 서울 컨트리 클럽이 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서울외곽 지역은 경공업 단지와 주거단지로 개발되었고, 서울 컨트리 클럽은 그 당시 국내 최고의 어린이 공원으로 바뀌었고, 경마장은 과천으로 옮겨졌다. 70년대, 오늘날 강남이라 불리는 영동지구가 개발되면서, 성수동은 서울의 중요한 중심부 중 하나가 되었다.
원래 해방 후 우리나라에는 구두공장이 거의 없었다. 다만 명동을 중심으로 소량으로 가게 안에서 제작해 주는 맞춤 살롱화 가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역 뒤 염천교 일대에 부자재 및 공장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은 도심 성장과 더불어 사업이 성장하자 좀더 넓은 외각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7-80년대 경공업 지대로 개발되어 있던 성수동 일대에 몇 몇 대형 제화 회사를 중심으로 군소 공장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성수동 구두산업은 일본에서 고급 기술을 배워오고 수요가 늘고 설비와 시설이 분화 되면서 생산성에 경쟁력이 생겨 80년대 구두산업은 호황을 맞이하였다.




성수동의 구두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들이 기술력은 이탈리아 명품에 뒤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실제 이태리 구두 유학을 다녀온 한 장인의 전언에 의하면 이탈리아 교수들이 한국 사람이 기계 틀 없이 구두 본을 성형하는 것을 보고 깜작 놀란다는 것이다. 자동화 된 틀에 익숙한 그들에 비해 한국사람들이 손기술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저가 물량과 국내 생산단가 상승으로 경쟁력이 밀리면서 저가 수입구두와 명품구두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예전에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지만 일본은 오늘날 인건비가 비싸져서 구두공장이 대부분 사라진 것과 같이 우리나라도 중국에 기술 전해주고 시장을 빼앗기는 격이라고 한 공장 관계자는 전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최근 강남의 디자인샵들이 높아진 임대료를 피해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적고 공장 창고와 같은 넓은 공간이 많은 성수동으로 이사 오고 있다. 오래된 제조업 현장과 현대적인 트렌드 샵들이 혼성되어 있는 매력적인 요소들 때문에 사회적 기업, 디자이너협동조합, 유명디자이너의 스튜디오와 같은 새로운 거주자들이 성수동으로 이주해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성수동 구두산업에 관련하여 일하시는 분들을 만나고 인터뷰 하였다. 그분들의 기억 속에 있는 일과 생존에 대한 생각들, 오랜 기간 일하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체득된 경험들, 그리고 복잡하고 유기적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각 제작 공정 간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등을 시각화하여 기록하고자 하였다.






<재화왕래도>
명동 살롱화 시절과 오늘날 구두 업의 가장 큰 변화는 대량생산을 위한 분업화 시스템이다. 해방 후 근대에는 소수만 사용하는 것임으로 대량 생산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신발제작자는 모든 공정을 손수 깎고 붙이고 바느질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요가 늘고 공정이 반자동화 되면서 각 공정 별로 분업 외주 시스템이 발달 되었다. 한 사람의 기술자가 제작의 전 과정을 통제하던 방식으로부터 각분야 전문가들이 분담하여 생산하고, 상호 거래하고 결합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신발공장과 관련된 거래처 사장님들이 신발을 얻는 과정이었다. 거래처에서 반품되거나 재고로 남아있는 신발을 만지작 거리고 있으면  '필요해? 그럼 가져가!' 이런 식으로 신발을 얻어 오신다는 것이다. 여화를 주로 제작하는 기술자들은 배우자의 신발은 많이 만들어다 주면서도 자신의 운동하는 거래처에서 싸게 사서 신는다고 한다. 거대한 분업화 조직망 아래에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흐름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기적 관계들을 드러내기 위해 구두 제작자들이 손과 도구로 그린 <제화왕래도>를 함께 제작하였다. 그분들이 사용하는 미싱, 가죽마커, 징 장식기계 등으로 그분들이 신발을 얻어오거나 부품을 납품하는 거래처들을 주관적 감각으로 덪붙이면서 성수동의 지형도를 그려 보았다.






<도구들 Arousing Tools >
물건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도구들은 용도와 목적이 비교적 명료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 용도가 아리송하거나 본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될 때가 있다. 어떤 도구는 만능의 역할을 지니기도 한다. 길이 든다는 것은 작업자의 손과 도구가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다. 너무 잘 드는 도구는 힘을 약하게 하고 너무 잘 들지 않는 도구는 힘을 강하게 준다. 도구의 사용법은 결코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 주관적인 감각과 몸으로 체득되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도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다. 대부분의 생을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완벽함 만으로 존중 받지 못하고 마감한다. 다 닳거나 용도가 다하면 폐기되는 것이다. 도구라는 말 자체가 무언가를 위해 이용되는 수단으로써 부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도구의 속성들을 생각해 볼 때 한번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드러내지 않은 체 사라져간 익명의 장인들과 중첩된다. Fecit 페키트 란 라틴어로  '내가 만들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의미이다. 고대장인들이 물건을 만들 때 작업물에 몰래 남겼던 표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로마 건축의 벽돌 작업자들은 건축가의 지시와 현장작업 사이에 공백이 있을 때 즉석에서 변화시키거나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모르타르를 바르고 자기이름, 자기종족 출신지역 등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익명의 제작자들이 자신의 존재와 흔적을 남기려는 존재욕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벽돌 공사현장에서 패키트(fecit)를 새겨놓은 고대 건설자들처럼 이 익명의 아리송한 도구들도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재료 위에 새긴다. 제작자에게 도구란 인간의 손과 더불어 문명을 세우고 상상하게 만드는 강력한 제의적(ritual) 물품이다.




도구들 Arousing tools_acrylic, serigraph on leather_가변크기_2015

한나 아렌트는 생각과 질문 없이 일에 함몰되어 고된 노동을 반복하는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vorans)'라는 개념과 왜 라는 질문과 함께 서로 어울려 공동체적으로 토론하고 판단하는 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를 구분하였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일에 함몰되어 왜를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모 파베르는 일을 멈추어 왜? 를 질문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작업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사실 이 두 가지 개념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다. 고된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어떻게 보면 나아질게 없는 환경이라고 말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묵묵히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손으로 하는 일과 생각은 작업 과정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순환된다.





한때는 예술가와 공예장인 사이에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제작자들은 길드조합에 소속되었고 집단적으로 공동체에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하였다. 그때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 분위기로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예술과 실용적인 물건(Craft)을 제작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 리차드세넷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이 두 가지는 행위 주체가 다르다. 예술은 일을 지휘하고 좌우하는 행위자가 한 사람인 반면 Craft는 행위자들의 집단이 주체다. 둘째, 시간이 다르다. 예술은 돌발적인 반면 Craft는 천천히 변화한다. 셋째, 자율성 면에서 놀라우리만큼 확연하게 구분된다. 홀로 일하는 독창적인 예술가는 장인 집단에 비해 별로 자율성을 누리지 못했다. 몰이해를 당하거나 완고한 권력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던 만큼, 더 취약한 존재기반에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상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들이 불분명하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 더 이상 일을 혼자 지휘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을 행위주체가 여럿이다. 독창성과 고유성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 집단하며 집단적으로 여러 협업의 시스템을 통과하여 작업을 제작하곤 한다.
흔히들 실용적인 제작물은 자본과 소비자의 요구에 종속되어 있고 예술가는 독창적인 개성을 표현하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꼭 그렇지 않다. 예술가에게 자율성이란 모든 치욕스러운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마지막 끈과 같은 것인데 실제로는 완고한 권력이나 자본의 몰이해에 누구보다도 쉽게 휘둘리는 취약한 기반 위에서 작업하는 게 대부분 예술가들의 현실이다. 특히 소수의 입지적 예술가 대열에 끼지 못한 체 창작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더욱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면 성수동에서 만난 기술자들(그들은 스스로를 기술자라고 표현한다.)은 일이 있으면 많이 만드는 만큼 많이 가져가고 일이 없으면 적게 만들고 적게 가져가는 이러한 도급시스템이 때론 경제적으로 박하기는 하지만 누구도 눈치보지 않고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개개인의 기술자들은 누구의 종업원이 아니라 기술자로서 상호 관계망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신발 제작자들에게 장인으로써 자부심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그 일에 대한 충분한 인정과 보상이 따르면 자부심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기술을 익히고 연구하여 새로운 신발을 개발했을 때 그만한 충분한 보상이 뒤따라오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대기업 브랜드 아니면 무조건 싼 것을 찾기 때문에 백화점에 납품하는 것과 똑같은 재료와 기술을 가지고 만들어도 울며 싸게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의욕이 좌절된다고 말씀하신다. 스스로를 장인(호모 파베르)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밑바닥 노동자(애니말 라보란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현실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일찍이 다다이스트들은 "공동으로 그리고 익명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라, 힘을 증가시키고 교만함을 누르기 위해" 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아의 신경증적인 표출이 과잉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예술과 산업을 불문하고 생존경쟁에 필수적인 시대가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3-40년을 꾸준히 한 가지 기술에 전념해 왔으면서도 자신은 하나의 밑바닥 기술자라고 말하면서 익명으로 묵묵히 일하시는 성수동의 장인들을 보면서 숙연해진다. 동네 형 따라, 친척을 따라 어쩌다 보니 이 계통에 평생을 몸담게 되었다고 하는 성수동의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더 이상 이 일이 예전의 호황기 때와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 지속하는 것은 어쩌면 이 일이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 일 것이다. 함께 일하고 익명으로 자신을 낮추고, 함께 막걸리 한 잔 비우며 절망을 털어버리는 성수동 사람들의 소탈함을 보면서 이분들의 삶의 방식과 예술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멀지 않음을 생각해 본다

2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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