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빈둥프로젝트 : 자율과 환대의 실험_ 아르코공공예술프로젝트

 


주관 : 빈둥협동조합

총괄기획 : 최형욱 (시각예술)

디렉터 : 최형욱, 고연주, 김중순, 전흥렬, 민수광

영상아카이브 : Page B 안진우

아카이빙 : 최영동(문학)

전시기획 : SisterHood 최아름 김현경

홍보 : 배주현

기술지원 : 김일수

디자인 : STUDIO KIO

기간 : 2022. 5 - 2022.12

장소 : 양평군 생활문화센터 및 인근 유휴부지 숲 

후원 : 아르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프로젝트는 2022-2023 아르코 공공예술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마을에서 노는 일이 어째서 이렇게 힘든 일이 되었을까? 


빈둥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저희 팀원들이 모두 함께 몸으로 체감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의 놀이는 과거에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웠던 일이 왜 오늘날 마치 강물을 역류하는 것처럼 구현하기 힘든 일이 되었을까? 입니다. 


첫 번째 어린이가 자유롭게 놀만한 장소 사용 허가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빈둥은 사유지를 빌려서 임의로 놀다가 치워본 경험은 이미 두 차례의 시범운영사업을 통해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아르코 공공예술사업을 통해서 놀이의 ‘공공성’과 사회적 공유지에 지속가능한 놀이 장소를 세우는 것으로 목표로 세웠습니다. 


여러 차례 지자체나 관련부서와 미팅 결과 결론부터 말하면 빈둥의 놀이실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땅 사용권리를 승인해 줄 공공기관은 없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라는 질문을 내세우며 어느 부서도 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논리는 관료 조직 시스템 안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무적의 명제인 것 같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추궁하고 누군가를 문책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 자체를 무마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예를 들면 공공 어린이 시설에 어린이가 찾아오지 않는 기이한 형태로 발현 됩니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산이나 관리의 용이함을 우선으로 운영하다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공시설이 되는 식입니다. 눈에 보이는 목표와 실제 운영 되는 무의식적인 운영 태도가 불일치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요즘 방과 후 학교 운동장은 책임 문제 때문에 보호자 동행 없이 사용을 금지하는 학교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한가한 어린이가 애초에 없긴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 돌봄 교실로 혹은 노란 학원차를 타고 다음 코스에서 코스로 혹은 부모의 차를 타고 바로 하원합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프로그램 안에 소속되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초대 플레이워커인 야마노 히데야키 씨는 이러한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두고 다대화(多大化) 사회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어린이가 어른들의 감시와 관리 아래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지점입니다. 지금 기성세대들의 어린 시절을 잠시 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산과 계곡과 바다와 골목을 누리며 스스로 개발한 콘텐츠들은 누군가 비용을 받고 가르쳐 주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어린 시절 배웠던 용기와 호기심 어린 탐구 정신은 어떤 프로그램에서 배웠던 것일까요? 방치와 자유의 중간쯤에서 스스로 친구들과 함께 체득했던 아닌가요?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요?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국가와 사회는 4차 산업혁명 AI 논하며 창의적 혁신과 역량중심의 문제 해결능력을 교육과정의 목표로 내세웁니다. 중등 대학 교육과정 10년 내내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 정을 맞고 조직에 들어가서도 무언가 열정적으로 기획을 하다 감사라도 걸리면 모든 것이 날아가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정신 승리'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린이들의 시간은 총칼 없는 전쟁터입니다. 

어린이들의 시간은 시장에서 돈이 됩니다. 출산율은 갈수록 줄어가는데 고모 삼촌 이모에 조부 조모까지 모두가 외동 하나를 지원합니다. 그러니 어린이 관련 콘텐츠 상품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한 경제 보고서에 의하면 2020년 키즈 콘텐츠 시장은 10년 전에 비해 거의 5배 증가한 5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평가합니다. 






제가 강남의 한 공립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예술수업을 진행할 때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무심코 질문하였습니다. 너희들 학원 끝나고 보통 몇 시에 집에 가냐? 3분의 2가 밤 10시 이후에 집에 돌아오고 일부 몇몇은 11시에 들어와 학원 숙제하고 나면 보통 새벽 1시에 잠든 다고 말하였습니다. 현재 고3이 아닌 12살의 하루입니다. 


그 아이들은 견디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들,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일수록 세상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각박한지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자신의 어린이가 뒤쳐지거나 자존감이 하락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것만 시킨다고 해도 그 최소한의 기준이 매우 버거워진 상황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2000년대 이후 이 강박의 기준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20-30년 전에도 대학입시와 비평준화지역 고등입시는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치열함이 점점 초등에서 유치원까지 아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높아지고 갖추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이 부모들의 마음을 엄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대에 상류 용이 되지 않으면 최소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in 서울 대학을 가지 못하면 괜찮은 직장을 얻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부모의 마음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소수의 상처 입은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가 모멸감과 수치를 주홍글씨처럼 새기고 살아갑니다. 이 두려움이 어린이들의 시간을 선행과 앞서야 한다는 강박의 시장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반면 한편으로 어린이들의 자유와 일탈에 있어서 부모들이 집안에서 자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부분은 바로 '스마트 폰'입니다. 단순히 중독과 게임은 나쁘다는 식의 사설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들의 건설적 여가 시간 활용에 대체제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도 마을도 친구도 공간도 모두 어른들의 선택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린이들이 자기 효능감을 마음껏 누리며 값싸고 빠르게 재미에 접근하는 방법은 스마트폰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린이들의 시간은 첨단 미디어 기업들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이미 직업적인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들 시청이 돈이 된다는 것을. 일단 한 번 입문하면 충성도가 높고 또 시청시간이 매우 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의 아직 덜 발달된 전전두엽의 충동에 취약한 구조는 미디어 생산자의 수익으로 연결되기 매우 쉽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만들기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젊은 부모들일수록 단체 조직 활동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느슨하고 자율적은 만남과 모임을 선호하는 성향이 뚜렷합니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열악한 사회 기반에 대응에 자조적으로 세력을 모아서 힘을 마련하고 이 조직의 힘을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통용되던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골 마을 별로 여전히 존재하는 새마을회입니다. 

새마을회 활동이나 각종 사회클럽과 협회활동은 자급 자조의 긍정적인 역할이 있었지만 현재에는 사실 마을 안에서 끼리끼리 이거나 여러 공공재 기득권을 일부 극소수 집단이 독점하는 등 문제도 많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양평에 신규 유입된 후주민 들은 이런 조직에 들어가서 부역을 하거나 봉사할 이유도 동력도 없습니다. 






공통된 관심사 기반이 무너진 사회에서 무언가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시도입니다. 


빈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 놀권리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로 모였지만 이 관심을 펼치는 방향은 모두가 제 각각 일 수 있습니다. 

내 아이만 창의적으로 잘 크기 원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내 아이가 잘 크기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생각일 수 도 있습니다. 이 일을 실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느슨한 연대의 방식부터 세력을 만들고 규합해야 한다는 방식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조율하고 조직하는 일은 전업으로 한다 해도 매우 힘들일 일 수 있습니다. 




빈둥은 상시 조직이 아니라 예술가, 예술교육활동가들의 느슨한 연대 조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전부 조직화해내기에 아직 한계점과 부족한 지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나가며. 신뢰의 거리를 향하여....


놀이터의 탄생 기원을 살펴보면, 많은 학자들은 놀이터는 15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규제가 느슨한 환경에서 어린이들은 생활영역 모두가 놀이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나이가 되면 귀족을 제외하고 바로 노동을 했습니다. 통합된 생활구조 안에서는 놀이터는 따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온 마을 곳곳에 빈틈과 구멍이 있었고 그곳은 모두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놀이터의 등장 시기는 기계 산업혁명으로 차량 전차가 등장하면서 거리가 위험해졌다는 인식과 시작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영국 등에서 프뢰벨 등 선구적인 교육자의 운동과 더불어서 최초의 놀이터가 생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환경문제와 더불어 도로와 거리가 위험하다는 인식은 어린이들의 활동을 실내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이 안전사고비율은 어린이가 보내는 절대 시간의 양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주택과 같은 실내에서 어린이를 보호할 때 자신의 신체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어린이는 신체감각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시와 거리는 위험하다는 믿음이 어린이들의 신체를 실내 환경으로 몰고 이는 다시 높은 주택 실내사고 비율로 드러나는 이상한 역학관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거리와 사회에 대해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이 충분하지 않을 때 육아는 고비용의 케어서비스를 통해 프로그램을 돌리는 방식으로 어린이의 신체 활동 범위를 제한하게 됩니다. '신뢰' 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마을에서는 육아는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김연금 박사는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라는 책에서 핀란드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어린이 이동성과 어포던스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포던스(affordance)는 행동유도성입니다. 예를 들면 뽑기 장수가 초등학교 후문에 자리를 펴면 어린이가 몰려듭니다. 어린이는 볼라드를 보면 타 넘고 싶어 합니다. 경계석이 일렬로 놓여 있으면 어린이는 외다리 타기를 꼭 하고 싶어 합니다. 어린이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도 활동을 유발하는 어포던스가 풍부한 환경을 <삐삐 롱스타킹>의 저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으로 "빌러비 마을" 모델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빌러비 마을은 놀이터가 가득한 마을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이동성과 어포던스가 풍부한 통합된 마을 환경입니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종일 뭐 하고 놀까를 고민합니다. 마을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고 그리고 그 마을 환경은 모두가 이 어린이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 장난에 골머리를 썩는 어른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게 이 어린이들의 성장을 격려하고 돕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GDP가 우리나라처럼 드라마틱하게 성장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 어르신들은 현세대 어린이들의 나약함과 배부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기성세대 어르신들은 이러한 '빌러비 마을'처럼 통합된 환경을 누리셨다는 점에서 저는 지금 세대 어린이보다 위험했겠지만 훨씬 건강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라고 추론해 봅니다. 어쩌면 그 어른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저력의 배경에는 이런 통합된 마을 환경에서 건강하게 놀면서 자랐던 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권정생의 <몽실언니>에서도 한국  전쟁 후 기구한 삶을 산 한 소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격한 시대 속에서도 고아 같은 삶을 사는 몽실이에게는 따뜻한 이웃 할머니와 정 많은 언니들이 있었습니다. 





제도가 잘 갖추어 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해지면 불필요한 금지와 제제 장치들이 늘어나고 한 아이를 기르는데 고 비용사회가 됩니다. 방과 후 아이가 남아 있는 학교 근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가득 찬 곳으로 간주하는 정책들은 일상생활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 돼! 하지마!로 점철된 시설과 도구들은 어린이의 창의성과 상상력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특정 소수만 놀이운동을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지역 공동체가 함께 이 '신뢰의 거리'라는 숙제를 풀지 않으면 모험놀이터도, 놀 권리 운동도 소수의 유별난 사람들의 잔치로 끝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특별한 어른들에게 영웅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어린이들의 이름을 전부 다 모르더라 도 '대충 눈에 익은 아이들이다.' 이 정도 관심만 있어도 됩니다. 아이가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물어봐주고 연락해 줄 수 있는 이러한 상식적인 환대가 있는 거리가 그 어떤 편의 시설로 가득 찬 어린이 청소년 환경보다 더욱 안전한 환경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신호등이 너무 많은 환경에서 자라 온 것 같습니다. 가! 가지 마! 해! 하지 마! 의 조항들이 빽빽한 환경에서 스스로 무언가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숙고하고 성숙할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교육의 과정 안에 너무 많은 신호 등을 세워놓고 어린이 스스로 자신의 몸과 환경을 통제하고 위험을 감지하고 안전하게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이러한 상호성의 시민 감각을 충분히 기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무런 신호등이 없을 때 우리나라 시민들은 자신의 속도의 이익을 위해 무한대로 속도를 높이는 시민이 많을까 아니면 주변에 짐승이나 교통약자가 튀어나올까 상호감각의 레이더를 극대화시키며 천천히 달리는 시민이 많을까? 상상으로 시뮬레이션 해봅니다. 이렇듯 어린이 놀이에서 출발한 질문은 이러한 상호책임의식과 민주시민역량과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에 대한 가치철학과 불과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신호가 없는 도로에서 한 운전자가 교통 약자를 실수로 치었을 때 신호등을 세우지 않은 국가에 책임을 미루고 부주의한 보행자를 비난하고 운전자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는 더 촘촘한 신호등을 세우는 방식으로, 보험회사는 약관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자사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짜 위험은 신호등과 빗장이 가득한 온실에서 12년의 유년 청소년시절을 보내다가 갑자기 청년으로 사회에 내던져진 상태가 아닐까요? 12년 교육기간 내내 안 돼! 하지 마! 더러워! 이런 이야기만 듣다가 청년이 되면 국가로부터 아이러니한 요구를 듣게 됩니다. "청년이여 도전하라!" 무슨 창업지원 아카데미와 청년 일자리 지원 정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선진 기업들은 학벌 좋은 청년들을 선발해도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논하기 전에 지금의 청년들의 12년 전부터 어떤 시간을 쌓아 왔는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놀이를 통해 자기와 세계를 마주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아이가 이 자유로운 실험의 과정 중 찰과상을 입고 골절상을 입을 위험 가능성과 그 어린이가 앞으로 현실에서 마주할 위험 중 어떤 위험이 더 큰 위험일까요? 한 번도 자기다움을 마음 껏 실험해보지 못한 체 놀이하는 기쁨과 자기 긍정을 경험하지 못한 체 사회에 덜렁 내던져지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놀이가 미래 인재를 기르는 창의성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물론 그러한 신경과학적인 근거가 밝혀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놀이의 결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목적이 라고 볼 순 없습니다. 니체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인생의 단계를 낙타-사자-어린이의 단계로 인간 정신의 성장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낙타는 현재 많은 기성세대 어른들이 말하는 세계입니다. You should의 단계입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단계입니다. 어쩌면 우리 유년-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의 교육은 이 Should를 훌륭히 수행하기 위해 보다 훌륭한 낙타가 되기 위한 연습으로 학습기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니체는 이를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책임과 짐을 짊어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단지 놀이를 훌륭한 낙타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간정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기존의 체제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려고 분투하고 싸우는 '사자'의 단계를 거쳐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인간 모든 생사고락을 다 다 앎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며 자유의 단계로 이른 어린아이의 단계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 정신이라고 니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즐기는 초연한 인간이 저희가 어린이와 놀이의 세계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낙타는 You should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I will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는 그저 I am이라고 말합니다. 




푸코의 개념을 빌려오면 현실에 구현된 반-공간으로서 일시적인 유토피아를 헤테로피아(Heterotopi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현실에 없는 이상 공간입니다. 현실 속에서 일시적으로 구현되었다는 측면에서 빈둥은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을 빗겨나가 있고 일종의 탈출과 해방의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빈둥은 일종의 헤테로피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삐삐 같은 어린이가 마음껏 누리는 빌러비 마을 같은 공간은 현대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빈둥은 일상을 빗겨나가 탈주하고 관점을 전유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일상을 살만한 곳으로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일상에 구현된 헤테로피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합된 마을 환경 아래서 놀이터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환경으로 가기까지 현실에서 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빈둥은 일시적으로 나마 관점을 바꾸고 잠시 해방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인 '빈둥플레이'를 만들어서 지역과 공유하고 합니다. 




| 빈둥플레이 디렉터 최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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