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교회미술과 성상논쟁 Essay for Medivel Art History
중세 교회미술과 성상논쟁
요즘 중세 미술사를 공부하게 될 기회가 있었다.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교회는 언제나 힘의 논리 앞에 유혹당해 왔다는 점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포스트모던사회에 대해서 ‘포스트모던,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의 뜻은 최근의 문화들은 다분히 글 중심 보다 시각중심이며, 내용보다는 겉껍질이 중시되는 사회라는 맥락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는 비잔틴 문명부터 로마네스크 고딕시기까지 그리스적인 고전미와 차별된 화려하고 독특한 시각문화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시각적 화려함을 획득하면 할수록 그 것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단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멀어졌고 종국에 가서는 시각적 화려함 이면에 하나님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인간주의 적인 예술로(르네상스), 혹은 예술이 없는 종교로(종교개혁) 분리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하층민들이었으며(고전1:26) 핍박 받는 사회의 비주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신앙의 열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은 식을 줄을 몰랐다. 또한 로마사회의 귀족, 장교들 중에서 더러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황제의 직접적인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충성했고 순교하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사회의 핍박을 피해 지하 무덤에 모였는데, 그들 중 어깨 너머로 로마의 미술을 익힌 사람이 있었는지 그들의 상황 속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풀무불 가운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 ‘죽음에서 살아난 물고기 속의 요나’, 등등 죽음을 초월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있는 그림들을 비전문가적인 필치로 하지만 매우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이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의 표현이었으며 교회적 차원에서 예배를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교 공인 이 후
그러나 핍박의 때를 견디고 황제의 공인과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주류로 부각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5-6세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을 형상화 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이후 점차 교회에는 시각예술이 주요하게 자리 잡아 갔다. 그러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6세기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추앙받던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다”라는 말로 회화를 옹호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시각예술을 옹호 했다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이후 천년의 미술사를 후원하는 교회의 성격을 예견하는 것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와 관련이 있다. 교회는 초기 아리우스파, 혹은 네스토리우스파와 같은 이단으로 부터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에 대한 위협을 받았고 그 당시로서는 적들이 사회,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로 어렵게 정통의 신학을 수호하고 오늘날 우리가 기초하는 삼위일체신학과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있는 그대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은 성상옹호론자에게 미묘한 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즉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 속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길 꺼리시겠는가? 우리는 이교도처럼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들은 수많은 갈등과 논쟁, 종교회의를 통해 번복되다가 결국 787년 니케아회의와 843년 비잔틴제국의 테오도라 황후의 최종 승인 덕분으로 성상옹호론자들이 승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시각예술은 사회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가운데 풍부하게 발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주교나 군주가 자신의 신앙심과 권력을 나타내는 일환으로 제단화를 주문하고 봉헌하거나 혹은 당시로선 아주 값비싼 필사본 성경을 주문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부한 양적 발전 이면에는 중세문화 자체가 황실귀족들과 일부 상층관리들의 문화로 고착되면서 일반 대중들의 세계관과는 단절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수에 의해 독점된 고급문화인 종교예술은 일반 대중의 세속적 세계관과 교류할 수 있는 순환의 통로를 마련하지 못하고 점차 경색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동 서 로마교회의 분열-우두머리싸움
그리고 기독교는 초기의 보편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서방 교황청과 동방의 로마 황제의 입장차이로 단절을 겪게 된다. 동로마 황제는 그리스 로마의 계승자이자 그리스도로부터 통치권을 이어받은 본인은 신권통치권자임을 자처하며 서 로마교회보다 우위에 있길 원했고, 서방 로마교황청은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계보를 잇는 절대적인 교권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권의 지배는 당시 사회의 지배와 동의어였다. 이 중세 최고의 두 권력가들의 갈등은 신학논쟁, 성상논쟁을 통해서 붉어져 나왔고 결국 동서 교회는 결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로마교회와 동방교회의 갈등은 양자모두 그리스도교의 우두머리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는데서 발생한 것이다. 결국 교회 내에서 이미지에 대한 논쟁은 누가 우두머리이냐는 권력싸움과 밀접한 연관가운데 진행되었다. 물론 교회는 질서상 머리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나 힘 있는 권력의 자리는 그 위에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알며 공평과 의를 베풀 책임만 있는 자리이다.(골로새서 4:1) 세배대의 아들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은 그 후 이천년 교회사를 통찰하는 매우 적절한 지적이셨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37-45)
권력의 투영, 시각예술
중세 문명은 그리스도의 성육화라는 신학적 기반아래 초월적인 실재를 이 땅에 가시화하고 가까이 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면 초월적 존재가 가시적인 감각을 통해 얼마든지 나타나거나 상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대한 멀티플렉스 아트센터가 되었고, 그곳은 신성을 느끼게 할 만큼 화려함과 웅장함이 가득했다. 권력은 가르침보다 우위에 있었고, 신을 위해 비싼 돈을 투자한 시각예술은 주술적 도구로 전락했다. 시각적 화려함은 사람과 권력자들의 감각을 만족케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떠셨을지 모르겠다. 신을 지시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었지만 그 형상에는 자신의 욕망 외엔 아무것도 투영되지 않았다. 그런데 실재 우리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가?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말구유 위에 뉘이셨다. 초라 한 다락방에서 아마도 막사발에 포도주를 나누셨을 것이다. 군병에게 따귀를 맞으셨고, 조롱 가운데 속옷까지 벗김 당하셨다. 대패질도 잘 안된 형틀나무에 거칠게 매달리셨다. 신성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중세교회가 표상하려는 신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편견일까? 비잔틴 중세문명은 분명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문화의 핵심이었지만, 화려한 궁정과 권력문화 이면에는 그리스도가 발견되기 힘들었다.
표류하는 이미지 : 우상
처음에 언급했듯이 최근의 문화는 시각중심의 문화이다. 독서보다는 웹서핑이 쉬운 시대이고 미디어의 발달로 우리의 눈과 귀는 쉽게 만족될 수 있다. 우리는 표의보다는 표상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세적 현상과 유사한데 시각적 화려함 이면에는 그 본래 지시하고자 했던 하나님이 없었듯이, 표류하는 이미지 가운데 아무런 내용이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가운데 유동하면서 역으로 자신이 생산한 이미지에 자신이 지배당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유희를 위해 게임을 만들었고 그 게임 안에서 가상의 돈들이 오가면서 아이템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가상의 돈과 아이템은 권력이 되어 그것을 사고팔기 위해 실재 범죄행위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과 같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표상에 본인이 해를 당하는 것이다. 어디 그뿐 인가? 0과 1이라는 디지털 신호들이 오고가면서 누구는 악성루머에 실제적 고통을 당하고, 누구는 계좌가 토막 나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 디지털 신호에 처음 힘을 불어넣었던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첨단의 이야기 같지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다. 이사야 44장에 보면 우상을 만드는 자가 나온다. 장인은 한 나무를 가지고 얼마는 땔감으로 사용하여 고기를 삶아먹고 또 얼마는 줄을 재고 대패로 깎아 우상을 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제작한 것에 엎드려 경배하며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라고 말한다. 이러한 행위는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 것이다.(롬1:21-22) 만들어진 이미지는 자율성을 획득하여 주체로부터 멀어지고 오히려 주체를 잠식시킨 것이다. 인간의 타락 과정과 매우 유사한 패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자의적이고 자기를 위한다는 것에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중세 천년의 시각문화 전부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분명 그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과 하나님 나라 틈에 끼어 눈물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방법, 그리스도의 원리대로 자신과 권력의 욕망을 투영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이 거룩한 예배가 되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믿는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일컬은 사람은 브사렐이라는 성막기구 만드는 시각 예술 장인이었다. 그가 만든 시각예술이 가치 있었던 것은 이기심과 임의로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이미지들이 현실을 잠식하는 시대에 유동하지 않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