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사물의 어법으로 공간을 이야기하다 (이선영 평론가 비평문)
이선영(미술평론가)
2010년 이후 최형욱의 작업들은 장소에서 영감 받은 바가 크다. 재래시장부터 재개발 지역까지, 섬부터 국도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적이다. 그것들은 그때그때 자신이 속해있는 장소를 단순히 소재 화하는 것을 넘어선다. 해변과 물 속 풍경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과 거리 같은 공공영역에서의 작업에서 장소는 저 멀리 있는 관찰 또는 관조의 대상이기 보다는 작가가 그 안으로 투입되는 장(場)이다. 이 장에서 주체는 변모한다. 장에 던져진 주체 또한 장을 미묘하게 변화시킬 것이다. 그는 이성과 오성의 작용대상으로서의 추상적 장소가 아니라, 상황과 실행의 장으로서 구체적인 자리를 중시한다. 이러한 자리들에서 눈과 손만 움직이는 것을 넘어서 몸이 또 다른 몸들과 함께 작동한다. 학교-화실-전시장 등으로 요약되는 닫힌회로 속에서 순환하는 고립된 예술적 주체는 이러한 열린 장에서 무장해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열린 장에서의 작가는 동료들 및 주민(관객)이 함께 하는 상호적 주체이다.
오십만원_2013 |
상호적 주체의 예술은 나도 그들도 아닌, 그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고 지속된다. 최형욱의 작업은 해당지역 주민과의 친교나 자료 조사 같은 물밑 작업부터, 현장 때로는 전시장까지 이어지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시공간에서의 특유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그는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2011년 봉화 마을에서 진행한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림보다는 공공영역에서의 문화예술 작업에 주력해 왔다. 그의 작업(그리고 작품의 극적인 변화)을 보면, 2000년대 이후 불어 닥친 대안의 공공 문화 예술 운동이 개별 작가에게 준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방적인 영향이기 보다는 개인에게 잠재해 있는 것이 현실화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가령 최형욱의 이전 그림을 보면, 이후의 관심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듯한 소박한 필치로 그려진 그림에는 관료주의나 상업주의로 체계화된 현실 속에서 고립된 대중의 일상사가 담겨 있곤 한다.근대 이후 순수미술이 된 미술 자체 보다는 현대적 삶에 대한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중시되면서 본격적인 회화보다는 일러스트같은 형식이 체택된다. 중세의 필사화나 어린아이의 그림이 그렇듯이 어눌하게 그린듯한 그림에서 진의가 더 잘 전달되곤 하기 때문이다.
삼백만원_2013 |
이백오십만원_2013 |
물론 그가 공공영역에서의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고 해서 그림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줄 하나 죽 그어진 추상화에 [삼백만원], [이백오십만원](2013) 등의 제목을 붙인 최근 그림들은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지는 미술계를 구경꾼 적인 입장에서 풍자한다. 최형욱의 회화가 근대미술의 금기를 어겨가며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듯, 입체작품 역시 미적 관조를 위한 순수한 대상이 아니라 어떤 ‘쓸모’를 향한다. 숙련된 목수 같은 기술이 발휘된 작품들인 [스킨쉽이 부족한 40대 중년 부부를 위한 러브침대](2011), [내 남자의 내연녀를 우아하게 물리치는 테이블](2012), [인격적 셀프 체벌 기계](2012), [내 아이를 위한 스마트폰 사용 훈련기](2012) 등은 예술 아닌 사물을 어법으로 우리의 삶을 말한다.
스킨쉽이 부족한 중년부부를 위한 러브침대_2011 |
예술이 화이트 큐브를 비롯한 추상적 공간에 있다면, 사물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있다. 초현실주의와 미니멀리즘을 거치면서 예술의 사물로의 전환은 현대미술의 흐름이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삶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양쪽에 한발씩 담그고 있어야 한다. 그의 최근 ‘작품’인 [비빌 언덕](2016)은 시골의 놀고 있는 땅에다 몇 달 동안 혼자서 만든 작업실이다. 정확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은 빈터에 규칙적인 노동과 수입을 전제로 한 삶으로부터의 해방구를 만들었다. 시장에서 가게의 성격에 맞는 예술 간판을 손수 만들어주었던 작가의 솜씨는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Fecit: 성수동 프로젝트](2015)에서 전면화했듯이, 최형욱은 이러한 작업들에 예술가적 창조보다는 이름 없는 장인의 미덕을 실행하려 한다.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 소외된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또는 그러한 자리조차 잡기 힘든) 현대적 삶에서 작가는 자본이 아니면서도 생산의 수단이 되는 그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다.그렇게 생산된 것은 사적 영역에 축적되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교환된다. 시장에서의 주민들과 함께 한 작업의 결과로 그들로부터 받은 떡, 계란, 반찬 같은 음식들을 소재로 한 작품 [이거 얼마니껴](2011) 프로젝트는 상호 호혜적인 작품이다. 축제나 종교적 제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음식의 교환은 이러한 호혜성의 주된 매개물이기도 한데, 그는 2014년 핀란드에서 레지던시 때 두부를 손수 만들어 나눠 먹기도 했다. 타자의 억압과 지배를 위한 축적이 아니라 남김없이 교환하는 것, 이 같은 ‘선물’의 메커니즘은 인류학 뿐 아니라 미학에서도 관철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이윤을 남기기 위한 생산품이 아니라, 끝없는 상징적 교환이 되어야 한다. 각자의 생산수단이 박탈된 상황에서 교환의 수단을 돈으로만 한정짓는 자본주의 사회는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주변화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노동이나 상품이 아니라, 작업과 작품을 소통시키고 싶어 하는 예술가 또한 소외된다.
아트두부 ㅡ_2014 |
최근 최형욱이 고양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고속국도 100번](2016)에서, 서울을 감싸고 있는 도로망이 포함된 공간은 좀 더 광범위하다. 그는 ‘사회의 부가 늘어나는 경로로 주변을 식민화하는 것’에 주목한다. 서울은 가치를 낳는 부동산을 주변으로 더욱 확장하면서 성장했다. 이 중요한 사실은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근대 이전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의 생산력을 가졌던 상황에서 근대 유럽이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을 뒷받침하는 자원, 노동자, 소비자의 확보였고, 그것은 때로 무력을 동반한 세계화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세계화란 어느 지역(그리고 그 지역의 자연과 사람들)을 주변화 하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주변화 할 곳이 없는 순간 억압과 착취는 그 스스로를 향할 것이다.
외곽 순환도로를 따라 펼쳐진 풍경들에서 작가는 자본의 공간 기획을 읽는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 기획’이라는 용어가 기술 관료들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그것은 국가의 영토를 합리적으로 가공하고 빚는 것을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대대적이며 마구잡이로 이루어지고 이익의 극대화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전략도 합리성도 창의적 독창성도 없는 도시계획과 건설 붐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빚어냈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저자에게 ‘공간 기획’이 중요한 개념인 이유는, 오늘날 지배계급들은 공간을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계급을 분산시켜 이들을 지정된 장소에 적당히 배분하여, 사회의 다양한 흐름을 제도적인 규정에 따르도록 조정하는 것, 요컨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하면서 공간을 권력에 복종시키고, 사회 전체를 기술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가리킨다. [공간의 생산]은 생산양식이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고 생산하는 동시에, 자신의 공간(자신의 시간)도 조직하고 생산한다고 본다. 앙리 르페브르의 결론에 의하면,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그래서 공간은 상품이나 화폐처럼 구체적 추상으로, 공간이 어떻게 생산되었나를 추적해보면 현재 사회의 발생기원 또한 찾아낼 수 있다.
인사이트씨잉_창동여지도 프로젝트_2013 |
창동스튜디오에서의 공공미술 작업인 [창동여지도](2013)나 이태원에서의 공공미술 작업인 [잇태원 : 감각의 지도 프로젝트](2014)에서도 그는 주민의 기억과 지각을 활용한 지도를 제작했다. 위에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기획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띈 인문 지리적 지도에는 자기화 된 기억이나 풍문 등, 공식적 지도에서는 배제되어 있는 기이한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정보들은 일률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질서를 따른다. 단일한 언어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가 구사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재현적 공간에 전제된 일점 투시법적인 독백이 아니라, 상호적 대화이다. 유아독존이 아닌 공존이며, 지배가 아닌 자치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향성은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은 협소한 예술계보다는 광대한 현실의 바다 속에서 보물을 캐왔다. 이 보물은 결국 사회적 자산이 된다. 이러한 사회적 지향성은 어떤 사회가 폐쇄되면서 야기되는 동질적 언어에 이질성을 개입시킨다. 그것은 예술에 기대되어 왔던 자유와 자율은 물론, 색다름 또한 가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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