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위한 브리콜라쥬 : 변용의 가능성 (작업노트)




# 삶을 위한 브리콜라쥬 :  변용의 가능성


Refuge bed, design kits, 2016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처음 올 때 이방인으로 내던져 진다. 그래서 항상 불안한체로 적응을 도모 해야만 한다.  인간이 황무지에 도착했을때 처음으로 하는 일이 지명붙이기 이다. 즉 ‘황무지의 인간화’(Edward Ralph) 를 시도하는 것이다.

어린이 예술교육 일을 하면서 주로 아이들의 자율적 놀이를 독려한다. 일단 놀이가 시작되면 아이들이 아지트 만들기부터 시작 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되었다.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행위가 놀이의  첫 단계인 셈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낯선 공간에 던져진 아이는 안정감을 느낄 만한 스케일의 공간을 만들면서 불안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른의 대부분 제작 행위는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들어 낸다. 이와 달리 고정된 목적을 뒤집거나, 낭비하는 제작행위가 있다. 예술은 과연 어느쪽에 가까울까?

비효율적 만들기의 대표적인 예는 아이들의 놀이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처음 만든 용도데로 사용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은 변용을 통해 자신에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환경을 바꾼다. 어른들은 아이가 어릴때는 그 변용의 힘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귀엽게 봐주다가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그 변화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 ‘하지마’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간에서 특정 행위를 금지하는 규율이 발생한다. 즉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위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비빌언덕 프로젝트 _이동식 작업실 셀프 리모델링_2015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법망이 느슨하고 엉터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 후 사회가 재건되던 시기 오늘날 노인이된 기성 세대들은 어려운 시절을 온 몸으로 통과하셨다. 생존을 위해 피난오신 분들은 서울 어디든 빈땅만 있으면 판잣집을 짓고 자리 잡았다. ‘광주대단지(1971)’ 강제 이주처럼 비극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지만, 자리 잡기에 성공하신 분들도 꾀 있다. 실제 이태원-한남동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인터뷰한 수 많은 어르신이 그런 과정을 통해 남산 자락에 정착 하셨다. 그분은 지독한 가난을 끈기와 전유와 변용이라는 현대적 기법을 통해 극복 하셨다. 남산의 일본 군부대 사격장 침목을 뜯어다가 본인의 집을 만들고, 남산신궁의 석재들을 가져다 집을 꾸몄다. 결국 불법주택 양성화 정책의 혜택을 받아 땅을 헐값에 불하받아 지금은 한남동의 건물주가 되셨다. 그러한 어르신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의 나약함을 염려한다. 



변두리 거주민을 위한 농막 프로토 타입_2018



그런데 오늘날 젊은세대가 겪는 어려움은 그 종류와 양상이 달라졌다. 가난과 생존의 위험이 아니라  그 변용의 가능성 자체가 제거된 것이다. 오늘날 아이들은 위험한 거리를 혼자 다닐 수 없다. 그래서 동물원 사파리처럼  차량으로만 이동한다. 구경꾼처럼 각종 교육서비스를 이용하다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자율적인 관계맺기와 삶을 위한 놀이의 가능은 거의 없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이해관계가 첨예한 대도시에서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해볼 엄두를 낼수가 없다.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는 점점 구역화되고,  애초에 증여가 아니고서는 진입이 불가능한 지역들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사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인식이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졌다.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점점 내재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변용의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의 입장에서 사회가 보기에  불편한  공간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즉 전쟁후 어르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틈새를 노리는 것이다. 

사실 이는 매우 전통적인 기법이다. 틈새를 노리는 것은 약자들의 전략이다. 어린이의 전략이다. 사회에서 주도권을 가질수 없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창의적인 전략이다. 







‘기회’란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다닐 자유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덩치가 큰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하거나 혹은 놀이터에 청소년들이 어슬렁거리면 어른들은 안좋은 시선을 보낸다. 혹은 명패 목걸이를 하지 않은체 지위가 불분명한 청년이 빌딩을 어슬렁거리고 다니면 금새 제지를 당한다.  
자율성과 환대가 사라진 도시에서 자유롭게 탐색하고 실험할 여지가 희박해진 상황 자체가 현대사회의 새로운 종류의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위험에 대응하는 비틀어진 만들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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