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플레이, 여백의 놀이실험_계간 민들레 2026 여름호 기고문
최형욱 KINGWORKSTUDIO
설치예술가, 공공예술기획자, 예술교육활동가. 2019 년부터 예술인협동조합 빈둥플레이를 조직하고 활동해왔다.
현재 암스테르담 라익스아카데미에서 입주예술가로 놀이성과 생태순환 관련 예술실천을 연구하고 있다.
빈둥플레이의 시작
빈둥플레이는 어린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실험 놀이터 운동이다. 2019 년 예술가 그룹의 시범
사업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시작해,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의 자기주도적 놀이 실험을 환대하는
활동을 부모 봉사자들과 함께 이어오고 있다. 학교 예술교육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어린이의
위기를 피부로 느꼈다. 지역별로 차이는 좀 있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주어진 버거운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3 학년 교실에서는 어린이의 3 분의 2 가 학원을 돌다가 밤
10 시 이후에 귀가한다고 말했다. 공공미술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터득하게 된 참여자 중심의 공공예술
방법론을 활용해 이 문제를 이웃과 함께 풀어내자는 생각이 빈둥플레이로 이어졌다.
빈둥플레이는 어린이에게 넓은 바깥세계를 되돌려 주고자 한다. 어린이가 자신만의 리듬과 속도로
실험할 수 있는 영토를 만들고,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스스로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고 싶다. 그래서 빈둥플레이는 놀이시설을 고정하지 않는다. 비어 있는 땅을 확보한 후, 지역 주민과
어린이가 그 빈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채워가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도록 기획한다. 매력적인
조형물을 설치하기보다 도랑의 물, 모래, 돌, 자갈, 잔가지, 폐목재, 자연의 부산물처럼 느슨하고 변용
가능한 재료들을 놓아두고 어린이가 스스로 놀이를 발견하기를 기다린다. 어린이의 놀이는 흩어진
조각을 발견하고 조합하며 재창조하는 연금술에 가깝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놀 줄 모른다?
기성세대 중 다수는 어린 시절 온 동네를 누비며 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늘날 어린이들이
스크린과 스마트폰에 함몰된 모습을 보며,
“요즘 아이들은 바깥에서 놀 줄 모른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빈둥플레이에서 관찰한 결과는 사뭇 달랐다.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도전과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 주어졌을 때, 아이들은 빠르게 자신들만의 놀이를 만들어냈다. 토굴을 파고 몸을 집어넣기,
폐자재로 요새 만들기, 다리 건설하기, 모래댐 쌓기, 칡뿌리 캐기, 뱀 허물 찾기 등 아이들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며, 요즘 아이들이 놀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성을 펼칠 만한 시간과 환경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일본의 모험놀이터 운동의 선구자인 아마노 히데야키는 오늘날의 도시화를 또 다른 의미로
‘다대화多大化 사회’라고 설명했다. 어린이 입장에서 보면 어디를 가도 관리하고 감독하는 어른이
지나치게 많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한 어린이가 ‘구덩이를 끝까지 파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품고 땅을 판다고 가정해보자. 학교 운동장에서 그런 행동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그런 어린이를 가만히 두는 어른은 보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현대 어린이들은
여러 프로그램과 강습을 쫓아다니느라 한가하게 구덩이를 팔 시간조차 없다. 스마트폰 게임이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빡빡한 일정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빈둥플레이의 예술가와 기획자들은 오랫동안 학교 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해왔다. 10 년
이상 통합예술교육 프로그램과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실행하며 꽤 숙련된 스킬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질문이 생겼다.
‘과연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일까?’
나는 때때로 최고의 예술교육 방법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기’라고 생각한다. 탄탄한 커리큘럼도
중요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실험적인 환경과 자원들을 흩뿌려 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기다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예술가나 기획자의 역할은 나서서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예측불가능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에 가깝다. 어린이가 스스로 발견한 동기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스스로 선택한 도구와 방법에 몰입하고, 실행하고, 망쳐보고, 다시
시도하며 성취를 축적하는 경험은 어떤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대체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빈둥플레이의 플레이워커로 활동하면서 주로 두 가지 전략을 취했다. 첫째는 ‘바쁜 척하며
청소나 하면서 돌아다니기’, 둘째는 ‘내가 하고 싶은 놀이를 직접하기’이다. 때론 내가 무언가 만들고
있으면 어린이들이 다가와 자연스레 의견을 덧붙이기도 하고 반대로 어른 예술가가 어린이의 놀이에
영향을 받아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 함께 상호적으로 영감을 주고받는 것이다. 플레이워커의 중요한
역할은 예술적인 놀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함께 놀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규율과 규칙 없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나?
아이들의 놀이에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한 걱정이 따라다닌다. 아이들의 ‘자유놀이’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또한 이것이다.
“규칙 없이 어떻게 아이들 사이의 충돌, 괴롭힘, 위험한 충동을 다룰 수 있는가?”
빈둥플레이의 환경은 겉으로 보기에 위험해 보인다. 연장과 폐자재가 널려 있고, 원칙상 아이들 활동에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빈둥플레이를 방문한 외부인들의 첫인상은 의외로
‘고요하고, 평화롭다’는 것이다. 하나의 프로그램과 단일한 목표를 위해 어린이들을 강제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흩어져서 자신의 고유한 작업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놀이가 허용될 때, 오히려
아이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규제와 규범이 발생한다. 규칙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존 듀이의 말처럼
규칙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놀이의 과정 안에서 규범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몇 가지 사례를 공유고자 한다.
# 사건 하나
불놀이
2019 년 빈둥플레이 시범 운영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프로젝트를 펼칠 공공장소 사용을 허가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놀고 있는 논밭을 하나 빌렸다. 처음 실행하는
프로젝트였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12 세 어린이 몇 명이 불놀이에 재미를 들였다. 점점 더 많은 상자 종이를 가져오더니 불을 점점 키우기
시작했다. 나는 숨죽여 지켜보았다. 머릿속에는 다음 날 지역 뉴스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어느 미치광이 예술가가 어린이들을 시켜 양평 논밭을 불바다로 만들다.”
같은 걱정을 하던 팀의 동료 한 명이 말없이 소화기를 들고 아이들 옆으로 다가갔다. 혹시 있을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한 소년이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선생님, 우리 못 믿으시는 거예요? 바람이 저쪽 반대 방향에서 불어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번지지
않게 지금 등지고 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바람의 방향을 읽고 있었다. 어른이 보기에는
무모하고 위험한 장난이었지만, 아이들 안에서는 나름의 감각과 판단이 작동하고 있었다.
# 사건 둘
하천 정화 프로젝트
2023 년 새로운 공공장소에 자리 잡았는데, 그 근처에는 고속도로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지나가는
도랑이 있었다. 비가 온 뒤면 맑은 물이 흐르고 개구리도 발견되어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환경이 되었다.
어느 날 한 어린이가 페인트통을 들고 공간 이곳저곳을 칠하며 돌아다녔다.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그
아이의 도발적인 행위가 제지 당했겠지만, 이미 몇몇 예술가들이 시설 곳곳을 페인트로 칠해 놓은
단서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아이가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통을 기울여 페인트를 도랑에 붓기 시작했다. 그 물은 침수조 습지를 거쳐 남한강으로 곧바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모든 아이들은 즉시 반응했다.
“한강으로 바로 흘러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며
모래주머니와 모래, 흙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물길을 막고, 정화를 위한 공사를 벌였다. 마침내 한 바탕
소란 끝에 자연재료 필터와 모래 댐을 통해서 도랑의 물이 점점 맑게 정화되었다. 누구도 그 아이를
꾸중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사건은 곧바로 공동의 놀이이자 환경에 기여하는 노동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문제 상황은 공동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 사건 셋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우리는 분해·조립 가능한 목구조 모듈러를 아이들에게 제공하곤 했다. 아이들은 못, 망치, 드릴을 이용해
구조물을 확장하고 증축했다. 그렇게 2.5 미터 높이의 놀이 구조물이 만들어졌다. 아래에는 볏단을
깔고, 해먹과 슬라이드도 달았다.
어느 날 용감한 남자아이가 2.5 미터 높이의 구조물에서 볏단이 깔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룹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평소 운동신경이 좋은 아이라 크게 염려되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열 살 남짓한 아이가 그 형을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결국 위태로워 보이는 구조물
꼭대기에 아이가 올라섰다. 나는 또 불안한 상상을 했다.
‘저러다 다리라도 부러지면 그 부모들이 나를 고소하겠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 꼭대기에 서서 바닥을 한동안 응시했다. 몇 번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말했다.
“어, 안 되겠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어른이 말려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느낀 두려움과 신체적 한계,
거리감, 높이의 감각을 스스로 판단해서 멈춘 것이다.
자연의 냉혹한 질서를 보면 살아 있는 존재는 언제나 위험을 마주한다. 이와 달리, 특히 동아시아
문화에서 보호자는 어린 자녀를 위해 가능한 모든 위험을 제거해주고 비바람을 대신 맞아주는 것을
사랑과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위험을 제거해주는 것이 곧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험을 제거하면 어린이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스스로 감각하고 판단할 기회를
잃는다.
겉으로 보기에 거칠고 위험한 놀이터일지라도 건강한 상식을 가진 어른들이 애정을 가지고 지지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놀이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실험실이 아닐까.
어린이들의 마음을 아는 어른들
빈둥플레이를 시작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여러 장애물을 마주했다. 소극적인 행정 시스템, 보수적인
의사결정 구조, 책임 회피 중심의 관료제,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민원이었다.
‘시끄럽다. 주차하지 마라. 이 빈 공원은 원래 빌라 주차장으로 쓰려던 곳이다. 내가 게이트볼장을 만들려고 했다.
놀이터를 하려면 내 땅에서 흐르는 빗물을 이 공유지로 흐르게 해달라.’ 이런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질문이 있었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놀게 하자는데 왜 이렇게 저항이 많지? 우리가 무슨 이 사회에 해롭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나?‘
그럼에도 이 실험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사람이었다. 어린이의 놀이와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내어주는 좋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동네에 들리는 어린이들 소리를 반기시는 인자한 어르신들, 군청과 면사무소에 지인들을 수소문해주고
소개해주신 전직 교감 선생님, 말없이 제초기를 가져와 풀을 깎아주고 가시는 아버님,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봉사를 해주시는 부모 활동가들….
어린이의 놀이를 막는 것도 어른이지만, 결국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어른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는 어른, 어린이처럼 놀 줄 아는 어른이 필요하다. 목적 없이 현재에 몰입하고,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어른들 말이다.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허용하면 책임을 져야 하고,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기꺼이 그 위험을 책임지고 감수하려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놀이, 틈새와 여백의 미학
‘놀다’라는 단어는 ‘일손을 놀리다’, ‘놀아나다’, ‘놀고 있네’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종종
‘쓸모없음’이나 ‘비생산성’의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산적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생산적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한다. 더 유능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종 놀이마저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도구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소위 ‘생산적이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하는 일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생산과
파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구 위에서 진짜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진짜 놀이는 쓸모 없는 일일까?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놀이를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 보는 관점에 반대한다. 놀이는
훌륭한 인재를 기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도구도 아니다. 놀이는 그저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에 가깝다. 대부분의 건강한 상식을 가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이 세계를
더 빠르게 돌리기 위한 부속품이나 자원’으로 팔아넘길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의도와
별개로, 실제로 우리는 어린이에게 시간과 공간, 경제적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있을까. 아이들의 삶을
어느 방향으로 조정하고 있을까.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어린이를 위한 표어가 아니라, 어린이를 향한 우리의 시간과 자원의
배분이다. 그 방향이 우리가 어린이를 어떤 존재로 ‘간주’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자유로운 놀이’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실패하고, 멈추고, 적당히
이상한 짓을 하며 빈둥거려도 괜찮은 틈새와 여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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