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비빌언덕 프로젝트 (3) 제언
작업실 내부 |
7월에 컨테이너를 일단 설치하고 이삿짐을 일단 2층 창고에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계단도 없어서 사다리를 놓고 2층을 기어 올라가서 짐을 넣었다. 그리고 데크와 계단을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한 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9월 추석 연휴 때 내려가서 공사하고 다시 공사는 중단되었다. 하고 있는 예술교육 강사 일이 12월부터 방학이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12월에 3주에 걸쳐서 남은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혼자서 작업을 했고 서울에 일이 있어서 왔다 갔다 했어야 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이 걸렸다. 아마 혼자서 풀 타임으로 이어서 했다면 14일 정도면 끝났을 작업 분량이었다. 한 마디로 시행착오로 인해 삽질과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과정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일하는 중간 시골로 내려가는
시외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때 묘한 기쁨과 설렘이 밀려 들어왔다. 시골 땅에서 흙을 파고 나무가 썩지
않게 돌을 괴고, 여러 나무 집기를 짜는 과정에서 오랜만에 손에 진흙과 먼지를 묻히게 되었다. 나무가 썩지 않도록 물 빠지는 도랑을 삽으로 파면서 문득 어린 시절 흙 놀이의 기억이 올라왔다. 정말 오랜만에 흙을 유희로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일을 잠깐 멈추고 미리 싸온 도시락과 귤을 먹고 따뜻한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마셨다.
따뜻한 음식들의 기운이 목을 넘어가는 느낌을 천천히 느낄 수 있었다. 겨울 중에 작업실에도 큰 눈이 내렸다.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논 길을 따라 걸어갔다. 수확이 끝나고 눈 덮인 논 밭 위로
무언가 껑충 껑충 뛰어갔다. 노루였다. 걸음을 순간 멈추고
나를 돌아 보고는 귀를 쫑긋 하더니 이내 다시 달려갔다.
공사를 다 마치고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에 홀로 앉아 드로잉을 하고 글을 쓰고 있었다. 공간이 아담하기 때문에 전기히터 하나로도
금방 훈훈해졌다. 넓은 남향 유리샷시 너머로 눈이 내리고, 억새
와 잡초 투성의 야산과 나무들이 보인다. 눈이 천천히 싸이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순간 극도의 행복감이
밀려 들어왔다. 우스겟 소리로 아내가 무슨 바람나서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실 ‘업실씨’와
바람이 났다고 대답했다.
어린이 예술 교육 일을 하면서 도시공간에서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과
안전을 박탈당하며 살아가는지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을 박탈당 하는 건 어린이들뿐만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어른들도 안전(경제적 안정)이 위협당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의 자유를 거세당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보다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젊은 날 대부분을
보낸다. 주거란 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몸을 누울 곳뿐만이 아니라 마을과 관계와 주변의 공유지를 모두 포함한다. 어려운 시절 산업화를 일궈낸
지금의 어르신들과 지금 젊은이들의 차이점은 삶의 공간을 스스로 일궈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 같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전쟁 후 재건이 시작 되었을 때 법망이 닿지 않는 치외법권지역이 많았다. 국가의 형편이 모든
걸 관리할 능력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전유와 전용의 가능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부모 할아버지 세대들은 무일푼으로 올라와 공유지 야산에 손수 흙벽과 나무 판으로 집을 지었다. 불법 판자집이었다. 야멸차게 쫓겨난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 도박에서
패배한 건 아니었다. 많은 수는 서울의 다른 지역이 개발되면서 분양권을 얻어서 나가거나 아니면 정부의
불법주택양성화 정책을 바탕으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불하 받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땅들은 오늘날
금싸라기 땅들이 되었다. 이처럼 어르신들
중에는 무일푼으로 도시로 올라와 몇 십억 자신가가 된 경험을 하신 분들을 종종 뵐 수 있다. 어르신들이
보기에 풍요의 기반 위에 시작했으면서도 나약한 소리를 하는 지금의 청년들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청년들은 밥을 굶진 않았지만 모험을 할 수 있는 터전을 굶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그러한 도박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아주
첨예한 이해관계 아래서 공간들과 관계들이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의와 제언]
내가 하고자 했던 실험은 이렇게 공간의 자유가 제한된 젊은 세대 중 그것도 이익을 아직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시각예술 작가로 살기 위해서 공간과 짐의
문제를 한번쯤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작업을 열심히 했는데 다음 대안 없을 때, 극단적인
경우 자신의 작업을 태우는 작가도 있다.
어떤 유명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태우는 것을 퍼포먼스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내 삶과 작업을 위해 공간을 마련한 것인지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내 삶이 존재하는 것인지 회의가 들 때쯤 다행스럽게도 작가적 입지를 세운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실을, 대출을 하든지 집안에서 돈을 끌어오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작업실을 마련 할 수 있겠지만 대출 자격조차 획득하지
못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위 말하는 미술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지점이 젊은 예술가들이 작업공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이유이다. 나 자신부터 보면 예술을 너무나 막연한 환상 속에서 쫓아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규정 지우는 공간의 위계를 극복할 수 있는 빈틈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극 소수를 제외한 예술가들은
적게 벌면서도 오랫동안 잘 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에게 주변에 놀고 있는 대지로 문을 두드려 보기를 권한다. 어떤 토지로 가야 하느냐 라는 질문은 토지의 성격과 법과 제도가 다양해서 나의 설명 능력을 넘어 서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기를 권한다.
지역 문화예술 기관들에게는 예술가에게 터전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기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5년 사이 각
지역별로 공립, 사립 문화예술재단들이 새로이 설립되었고 특히 낙후된 지역을 문화 예술을 통해 재생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유치하는 것을 핵심사업으로 하는 공공예술 사업들이 많아졌다. 예술가들을 유치하고자 하나
사업비용이 문제일 때, 기관들을 지역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열어주고 각종 허가절차를 도와주고 작가들은
자신의 컨테이너를 가지고 들어가는 방법도 생각 할 수 있다. 기간이 끝나면 작가는 그 컨테이너를 트럭에
싣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현재 느끼고 있는 자유와 자신의 공간을 스스로 조직하고 만드는 행복한 경험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저렴하게 하고자 하였지만, 이 정도 비용
조차도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들도 매우 많다. 그러나
이미 약간의 보증금에 월세를 30정도
이미 다년 간 내고 있어왔던 작가들에게는 시도해 볼 만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시간적 자유는 예술가의 삶을 살기 위해 경제적 불편함을 감수했기 때문에 획득된 시간적 자유이다. 그러나 공간이 경우는 내게 주어진 자원의 한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들어갈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내야 한다. 결국 보통
청년 작가에게 3년에서 4년 치의 작업실 월세에 해당하는
비용으로 월세 제로의 20m2 사무실과 20m2짜리 창고를
소유하게 되었다. 물론 넉넉한 공간은 아니다. 그래서 2층 창고가 너무 빨리 포화 되지 않도록 작업을 되도록 천천히 만족스럽게 진행 할 생각이다.
비빌언덕 드로잉_Ink on paper_788x1091mm_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