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저스트 두잇 유어셀프 (JUST DO IT YOURSELF) 전 전시서문
JUST DO IT YOURSELF
저스트 두잇 유어셀프는 이미 친숙한 광고 카피와 유행어에서 가져온 기괴한 합성어이다. 전형적인 성공을 만들어낸 광고 대행사의 카피와 소위 개인들의 주체적 만들기를 강조하는 DIY 사이의 기괴한 조합 사이에는 오늘날 시대 상황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연대책임에 대한 은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유와 의지의 표현은 자유주의 이념아래 ‘강자의 자유’로 변용되었고, ‘스스로 해결하라’는 주문은 고립된 개인에 대해 서로 돌볼 책임이 없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라는 개인은 분화된 기술사회에서 자율성을 누리며 개인으로 홀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유발하였다.
JUST DO IT !!
이 가슴 설레는 문구는 구매욕을 자극할 뿐만이 아니라 도전정신을 강조한다. ‘저스트 두잇’은 88년 이래 나이키사의 광고 문구이다. 당시 이 문구로 매출이 40퍼센트가 뛰는 기염을 토하였다. 물론 개인에게 무언가를 해 낼 수 있다는 도전의식과 자신감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구가 당시 악명 높았던 연쇄살인마의 “let’s do it!” 이라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비화는 매우 의미심장하다.1) 결국 그 자신감과 자유는 그러한 자신감과 자유를 결여한 다른 개인에게는 잔혹한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중세 장인과 예술가 사이에서 “자율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고찰하였다. 특히 예술가에게 자율이란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부로부터 오는 충동이 절대적으로 작용 한다.2) 예술가는 홀로 서야하는 마지막 개인이다.
과연 그렇다면 예술가는 고유한 ‘개인’으로 홀로 서서 내적 충동의 자율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예술가는 르네상스시기 기능 장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이래 대중의 몰이해와 완고한 권력 그리고 시장으로부터 가장 취약한 계층이 아니었던가? 과연 예술가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고객의 필요를 위해 주어진 제약 안에서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엔지니어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래 자유주의의 기원을 살펴보면 근대 이전의 봉건적 특권계급의 전횡에 저항하기 위해 새로 성장한 시민 부르주아 계층의 이념이었다. 그 핵심은 ‘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법치기반을 세우는 것을 골자로 한다.3) 그런데 이 자유에는 애초에 재산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 이르면 더 극적으로 변화되는데 개인이 최고의 가치이고 목적이며 어떠한 권력도 개인에게 강제를 행사할 수 없다는 구호는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재산권과 기회의 균등이라는 가치는 애초에 지킬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허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개인의 선택과 능력에 따라 누구나 소유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기회 균등”의 구호는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이익 추구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된 상황에서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로 이해될 뿐이다.4) 그리고 사회는 실패자들을 돌볼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결국 여기서의 자유란, 강자의 자유, ‘거인의 자유’를 의미한다.5)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메시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선거철만 주인인 제스처를 취 할 것. 그리고 그 외의 기간에는 잠잠히 있을 것. 그리고 어떤 혼란한 상황에서도 멈추지 말고 쇼핑할 것!
보수적인 관료조직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회는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자율성을 그리 환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권위주의적인 관료제 위주의 사회에서 자율적인 예술가들이 무뢰배로 인식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Yourself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개인’은, 특히 예술가라는 개인은 더욱더 강한 개인이 되기를 요청받는다. 여기서 요청되는 개인은 고립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난관을 극복해가는 피투성이의 개인이다. 정말 그러한 ‘개인’ 밖에 모델이 없는 것인가? 소수만 살아남고 다수가 패배하는 그 고독한 싸움터에서 피 흘리며 고독하게 살아남아 다음세대에게 이렇게 외칠 것인가? “도전해봐! 너도 할 수 있어!” 이 구호아래 얼마나 더 많은 자기계발을 해야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고용 없는 성장이 고질화되고, 정부의 일자리 늘리기 정책은 4대보험이 안 되는 직종들만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경제학자들은 ‘뉴노멀’, 즉 새로운 정상 상태라고 평가한다.6) 역사이래 초유의 고스펙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자기계발을 하며 좁은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의 다른 한편에서는 창조적 지식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스스로 삶을 주체적으로 세우기 위한 실험들을 하고 있다. 대량 소비사회에서 소유한 물건의 운명을 본인이 결정할 수 없고 할부 납기일이 끝나면 폐기하고,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는 게 더 효율적인 시스템 아래서, 자기 물건과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설정하기 위한 움직임들이다. 대부분 권위주의와 허례, 허식을 싫어하고, 현명한 소비를 추구하며, 생태에 대해 생각하며, 타인과 주변 환경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향하는 성향의 사람들이다. 스스로 만들고 배우고 놀면서 세계와 개인들의 관계를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박홍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상관자유”를 추구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상관 자유란 다시 말해 타인과 상관된 삶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적절하게 발현 하는 것, 의미 있는 개인의 경험들을 연결하고 타인과의 상관과정 속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7)
더 이상 공동의 이해나 가치관 아래 단결해야 할 이유가 없는 시대,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을 만들어 패거리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창조성과 잠재성을 발현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질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개인들로 서로를 관계 맺을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느슨한 연대
윌리엄 모리스는 “각자가 올바른 곳에 있고, 남을 시기하지 않으며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명령받지 않고, 누구나 타인의 주인이 되는 것을 경멸하게 되는 상태”로써 검소한 노동과 예술을 강조하였다.8) 자신이 위치할 자리를 바로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분화의 갈등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예술작품은 많은 사람의 노동력에 기대어 생산된다. 전시장 스텝부터 시작하여, 인쇄, 운송, 유통, 설치 일용직, 기기 대여, 홍보, 미디어 등등 작품은 하나의 물체이기 이전에 행위이고 또한 사회적 인간관계이다.9) 즉 예술의 원형은 소비할 물건이 아니라 신체와 일련의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Solidarity 라는 말의 기원은 디드로의 <백과사전>에 나타나듯이 채권법적 연대보증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공통의 이해관계가 없는 분화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에서, 더군다나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최후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예술가들에게 상호호혜적인 채무관계를 일부러 짊어질 이유는 무엇인가? 함께 힘을 모아 성공을 도모하기 위해서? 지금은 그러한 새마을 운동시기와 상황이 달라져있다. 함께 힘을 모아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는 작게는 집단이기주의에서부터 크게는 제국주의까지 우리는 충분히 그러한 배타적 억압의 피해를 역사적 몸으로 견뎌왔다. 한 집단의 강함과 이익은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에게 배제와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배제 당해 왔고 상처를 받아왔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아래 우리의 실험은 어떠한 관점을 제시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 관계 맺는 과정 자체를 전시문법으로 설정하고 각자가 개인으로서 잘 설수 있도록 돕고 각자의 상상력의 발현을 돕는 느슨한 공존으로써 서로를 위치시키고자 하였다. 요즘은 우리가 모이기 위해 작업을 하는지 작업을 하기 위해 모이는지 경계가 애매해져 가고 있다. 과연 우리도 모르는 우리가 바라는 흐름을 향하여 흘러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서로를 상상력의 확장의 수단으로
누군가는 실제 필요한 일손으로
누군가는 작업의 메타비평과 퍼포머로
누군가는 공간의 일부이자 행위자로
누군가는 서로의 기억의 푼크툼(punctum)을 작업의 장치로 사용한다.
서로에게 간섭을 허락하고 약간씩 착취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기로 합의를 하고 나니 무게중심을 에고(ego)로 부터 상호 간섭의 과정 속으로 흩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서로에게 열려진 틈 사이에서 일종의 느슨한 이 공동체를 나 자신의 확장으로, 나의 ‘사회적 몸’으로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실험은 어쩌면보다 먼 미래에 효력을 발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전시가 끝나고 다시 고유한 ‘개인’으로 돌아가 각자도생의 삶을 여전히 살아야 한다. 심지어 미술계 공모전에서 서로를 경쟁자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리 중 누군가는 성공적으로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소수의 대열에 올라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그때쯤 이 전시기획을 돌이켜 본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고립된 개인과 헛헛한 자유로부터 출발한 실험들이 각기 다른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실험했던 이 자리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글: 최형욱
<각주>
1) 2015.03.19.중앙일보, “나이키의 'Just Do It'은 살인자의 마지막 말?”
2) 리처드세넷, 김홍식 역, 장인, 21세기북스, 2010, p113
3) 박호성, 공동체론, 효형, 2009, p292-293
4) 박호성, 같은 책, p323
5) 박호성, 같은 책, p119
6) 조형근,김종배, 섬을 탈출하는 방법, 반비, 2015, p7
7) 박홍규, 자유란 무엇인가, 문학 동네, 2014, p26
8) 박홍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개마고원, 1998, pp226-227
9) 이와사부로 코소, 서울리다리티 역,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갈무리, 2012, p243